"경험이 선험으로, 역사가 이성으로, 심리가 본체로 전화한다."
-서문-
저자는 이 한 문장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리한다. 한단어로 정리하기도 한다. 밥먹는 철학.
반항하는데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는 모택동 말만큼이나 간단한 요약. 공산당에게서는 자유주의자라고 비판받고 자유주의자에게는 덜떨어진 공산당이라고 비판 받는 사람.
내가 거기다 꼬리표를 하나 더 붙인 다면 '서양철학자'.
그는 죽어버린 중국문화전통을 되살려 냈다는 평가를 풍우란으로 받았지만... 풍우란 만큼은 아니지만 서양철학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개인의 정감을 강조하다 보니, 부모와 조상, 자손이라는 개인을 초월하는 정서에 대해서, 귀신과 제사라는 禮制의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마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이라는 두 캐릭터로 중국의 미감을 정리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현실을 즐기는 데 있어 신명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좀 덜할 수도 있겠다. 주나라의 인문주의를 중시한다면 말이다.
情으로 인간의 문화를 환원하는 환원주의적 경향까지는 아니지만, 情을 합리성의 측면에 치중에서 설명하는 것은 그가 칸트에서 벗어나고, 극복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칸트의 영향아래 있는 듯 하다.
神明이 없다. 성리학을 합리성으로서 도덕적 본성을 강조하여 설명하는 것은 풍우란이나, 모종삼 같은 신유가와 다르지 않다. 주자가 고심한 것에는 귀신의 문제도 있었다.
巫史 전통이라고 하면서 巫를 너무 소홀히 여기고 史를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유물론적 접근이라고 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반역사적접근에 대한 비판이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기울 수도 있다고 본다.
서양은 이원적, 중국은 일원적이라는 웅십력 이래의 도식을 진화시켰다고 할까.
예수는 신이면서 사람인데, 다른 말로 만신이 아닌가, 바로 큰 무당이다. 이원성은 오히려 플라톤과 이집트의 신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전투에서 패한 뒤, 종이 만드는 법이 서역에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종이의 역사와 중앙아시아를 통해 전해진 종이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탈라스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영역 안에 있는 지역이다.
당 현장(삼장법사)이 불경을 가져온지 1세기 넘어서, 서쪽으로 제지술이 전파되었다.
저자는 제지술 전파의 주된 배경은 이슬람교의 등장으로 인한 코란의 필사수요라고 설명한다.
문화 유입은 수요가 있어야 있어야 정착된다는 이야기다.
달에서 놀던 이태백이 서역 출신 한족이란 것도 알았다. 거기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피루스를 이슬람세력이 태웠다는 것도 기독교쪽의 선전이라고. 기독교도 들이 수백전 전에 성경과 다른 이교의 서적을 불태워 버려서 태울 것 조차 없었다고 한다.
데카르트 같은 근세인들이 나오던 무렵 부터 유럽이 중동도 비슷한 문화적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중세후반 유럽인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한 것은 이븐 시나(아비켄나)라는 페르시아 출신의 이슬람 철학자가 쓴 아랍어 책을 통해서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아랍어 번역본의 라틴어 번역본을 가지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일본어 번역본으로 춘향전을 공부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병자의 광학光學
미쳐버리지 않곤 바른 말을 못 한다는 뜻으로도 되고 언제나 바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쳐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도 된다.
미치기 위해서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미치기 위해선 민감한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철사 같은 신경이라야만 살 수 있는 세상에 비단실 같은 신경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부득이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220쪽-
제 3 공화국에 대한 이병주의 문학적 서술.
4권 째.
이병주의 문학이 응당 받아야 할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를 알것 같다. 그의 소설이 팔려 돈을 좀 번 것을 평가라고 한다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학의 관점에선 높게 그의 소설은 대단하게 평가되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 언급도 되는 '糞地' 같은 절창에 비하면 이병주의 글을 용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병주의 장점은 그 용렬함에 있다. 문학이 문학이 될 수 없는 때에는 문학은 문학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병주는 이 점에 있어서는 충실했다.
이병주는 다른 사람들이 '그가 살짝 돈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라고 표현할 부분에서, '그가 살큼 돈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표현한다. '살짝'이라 하지 않고 '살큼'이라 하는데 묘한 쾌감이 있다. 이런 것들로 해서 소설책을 읽을 때 속독법으로 읽지 않는다. 속독의 원칙은 소리를 연상하지 않고 눈으로만 보는 것을 주로, 눈으로 보기만 하면, '살큼 돈 것이 아닐까'에서 살큼이 만들어내는 쾌감을 느낄 수 없다.
내게 소설이건 뭣이건 빨리 읽어야 한다는 속독 강박 같은 것이 있기는 하다.
속독을 딱히 배운 적은 없고, 물리치료사 공부를 하던 작은 형이 집에 두고 간 속독법 책을 초등학교 시절 혼자 보면서 몇 번 연습한 적이 있었다.
요령은 먼저 글자를 '소리'를 상상하지 않고 보는 것이 먼저이다. 그 다음에 눈을 좌우로 빨리 움직여 한 줄을 빨리 읽고 다음 줄로 나가는 연습을 한다. 다음에는 한번에 한줄씩 본다. 이렇게 한 다음 지그재그로 시선을 움직어 한 페이지를 본다. 그 다음에는 한번에 대각선으로 시선을 움직여 한 페이지를 본다.
익숙해지면 책을 펴놓고 시선을 대각선으로 움직여 두 페이지를 본다. 여기에 익술해지면 마지막으로 한번에 두 페이지 전체를 본다.
사람들에 따라 다르지만, 내 경우는 소리를 연상하면서 읽을 때 빨리 읽으면 분당 2000자 정도 읽는다. 소설이면 대개 300~400쪽 되는 책을 네시간 안쪽에 읽는다. 물론 음미하면서 읽으면 더 천천히 읽기는 한다.
눈으로 보는 속독법의 경우 속도의 차이가 심한데, 대개 서점에서 '자기계발서' 같은 책들 훑어 볼때 5분에서 10분이면 다 보게 된다. 그러고선 다시 읽을 만한 부분으로 되돌아 가서 소리를 연상하며 읽어보는데, 그러고도 더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되면 책을 산다. 이렇게 하면 책을 거의 사지 않게 된다.
내게 실생활에서 속독법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앗다. 주로 보는 책이 한문책이거나, 난해한 철학책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학부시절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법철학을 속독으로 읽었는데, 두통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 천천히 읽어서 이해가 안되는 책은 빨리 읽어도 이해가 안된다.
게다가 눈으로 소리를 연상하지 않고 본 책들은 그 내용이 잘 연상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불분명한 느낌으로 남아있지, 그것을 언어로 불러낼 수가 없었다. 어떤 속독법 책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도형이나 공간 등으로 상징화 시켜 기억하고 연상하면 된다고 하는데, 따라해보면 어떤 때는 되기도 하지만 주로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한번 전체의 틀을 파악하기 위해 속독하고 중요한 부분은 소리를 연상하며 다시 읽어본다.
책을 빨리 읽어 돈 벌어야 하는 경우-자료조사 등등-가 아니라면, 속독법을 쓰지 않는다. 천천히 읽는다고 해도 보통사람보다는 좀 빨리 읽는다.
오히려 만화책은 보통사람보다 천천히 읽는데, 대사도 다 읽고 그림들도 천천히 구도와 디테일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글자는 읽고 그림은 감상한다. ( '근성모'화백의 태극기 펄럭펄럭, 이나 개나리 스텝 같은 만화는 좀 그렇다.)
재미를 위해 읽는 책은 놀이를 위해 읽는 것이라 속독할 필요가 없으니, 천천히 즐기는 것이 바로 책을 읽는 목적이다.


